Q. 안녕하세요!
올해로 23년째 일본어 번역 중인 정지연입니다. 현재 프리랜서 번역사이자 PM으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주로 IT, 의료/임상, 정부, 공학 분야를 다룹니다.
Q. 첫 시작을 빼놓을 수 없겠죠. 어떤 계기로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처음 받은 일감은 어땠나요?
특이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저는 해양학과 일어일문학을 복수 전공했어요. 처음엔 해양학 관련으로 일본 유학을 갈 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일본어 자체에 흥미를 느껴서 복수 전공까지 하게 되었어요. 졸업 전에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회사에서 특허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전공 수업에서도 다뤄본 적 없는 특허 관련 번역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특허는 일반 문서와 다른 표현도 많고 문장 구성도 정해진 형식이 있습니다. 거기에 맞춰 작성하지 않으면 반려되는 경우도 많아서 담당 상사에게 몇 달은 혼나면서 배워나갔죠. 거의 매일 울면서 출근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실력 면에 있어서는 물론 정신적으로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달까요.
어려운 분야로 시작해서 실력을 쌓아보니 어떤 분야든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기필코 해내겠다는 의지도 많이 생겼던 거 같아요.
Q. 고된 경험이었지만 번역사님께 든든한 자양분이 된 게 틀림없네요. 그렇게 벌써 23년 차에 접어드셨는데, 일하시면서 겪은 일이나 배운 점을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학교에서 배운 대로, 회사에서 알려주는 대로 따라가기 바빴던 거 같아요. "나중에 번역 일을 하겠어!"라고 마음먹고 시작한 게 아니다 보니 좀 더 많이 공부하지 못한 게 아쉽게 느껴집니다. 기본을 좀 더 다진 상태로 시작했더라면 번역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죠.
7년 정도 회사 생활을 했는데, 마지막 1년 정도는 에이전시 통해서 일감을 받아 겸업을 했었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프리랜서로 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죠. 출퇴근하지 않아도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해서 쓸 수 있고, 수입 측면에서도 괜찮을 거 같아서 과감하게 프리랜서로 전향했습니다. 이 시기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서 자신감도 가득했고, 회사 입장에서도 보수에 걸맞은 결과물을 제공할 수 있는 번역사라고 생각했는지 일감이 정말 많았어요.
이렇게 바쁜 시기에 결혼과 육아에 돌입하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육아를 하다 보면 일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냉정하게 말하면 회사 입장에서는 내가 아니어도 일할 수 있는 번역사는 많으니까요. '한번 일을 거절하면 그대로 일이 끊기지는 않을까' 하는 게 제일 걱정됐던 거 같아요. 낮에는 육아하고 밤에 아이가 잠들고 나면 새벽까지 일해야 했던 시기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기였어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고, 일을 하면서 내가 나로 있는 게 느껴져서 악착같이 해내려고 했죠.
Q.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일을 할 때 특히 지키려고 하는 원칙이나 철학이 있나요?
"자만하지 말자"는 마음이요. 조금이라도 자만하게 되면 어떻게든 표가 나게 마련인 것 같아요. 경력이 쌓이고 전문 분야가 생기다 보면 자신감이 붙게 되는데, 그 자신감이 어느 순간 자만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기존에 세웠던 기준을 이전만큼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경우도 생기죠.
산업/기술 번역에서 다루는 텍스트의 경우, 문장에 숨은 의미는 그리 많지 않아 직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면 문장이나 표현에 있어서 다소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럴 때면 클라이언트에게 좋지 않은 피드백이 오더라고요. 표가 나는 거죠. 그래서 일할 때 되도록 문장 하나하나 의미를 신중히 파악하고 자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Q. 갈수록 AI, MTPE 등 기계와 협업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고민하고 계신 부분은 무엇인가요?
수입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작업해 온 회사들(사기업, 공기업)과 꾸준히 일하고 있어 안정적인 편이에요. 번역 시장 측면에서 봤을 때는 (등장한 지 오래지만 갑자기 주목받게 된) AI 번역 등으로 인한 혼돈의 시기 속에 있는 거 같아요.
비용 절감이 중요한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AI 번역으로 번역이 수월해질 거라 생각하지만, 전문 번역가 입장에선 AI 번역물의 품질이 아직 부족하다 생각하죠. 지금 당장은 부족한 면이 있지만 앞으로 기술이 개선될수록 번역가가 필요 없어질 거라 말하는 분들도 있고요. 또 한편에서는 그래도 사람 손을 거친 번역이 분명 필요하다는 분들도 있고. 이렇게 혼란 가득한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Q. 23년 차이신 번역사님도 여전히 불안함을 느끼시나요? 불안정함에서 오는 불안감을 선생님은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날은 엄청 불안하고 걱정을 가득 안고 잠들기도 해요.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다 까먹어버릴 만큼 낙천적인 성격이라 크게 걱정하며 살진 않는 거 같아요. 사실 걱정한다고 해도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요!
그리고 일하다 보면 느끼실 텐데 번역 업계도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어요. 일이 없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일감이 '미친 듯이' 몰려드는 시기도 있거든요. 정말 이제는 좀 자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전 일 없는 시기엔 일이 많아지기 전 놀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즐깁니다. 평소에 가고 싶었던 전시회를 가기도 하고, 프리랜서의 장점인 평일 여행도 다녀오고요.
걱정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한없이 그리로 빠져들게 되는 수밖에 없어요. 불안한 마음은 분명히 있지만 그걸 즐거운 기억들로 채워나가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읽으셨나요?
정지연 번역사님이 오랜 시간 쌓은 일 이야기를 한 페이지에 담기는 어렵지만, 짧은 인터뷰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
정지연 호랭님은 🐯호랭 번역스터디의 일본어 피어리더를 맡고 계십니다. 이번 10월에 돌아올 번역스터디는 실제 프로젝트처럼 긴 원문을 긴 호흡으로 살펴보며 실무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애매한 부분 처리법까지 배워볼 예정인데요. 짧은 원문은 잘 다루지만 비교적 큰 프로젝트에서 클라이언트 피드백이 미지근했거나, 어디 물어보기 어려웠던 애매한 부분은 어떤 기준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배울 필요성을 느꼈다면 오는 10월, 🐯호랭 번역스터디에서 정지연 호랭님의 23년 경력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받아 보세요 :)